Agua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 박병규 옮김
판타차 아저씨와 내가 광장에 도착했을 때 회랑(回廊)은 텅 비어 있었다.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돈에우스 타키오 모퉁이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산들에 둘러싸인 마을은 조용했고, 쌀쌀한 아침 시 간이라 왠지 서글프게 보였다. 판타차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산후안 마을이 죽어가고 있어. 광장은 마을의 심장인데, 광장을 봐라. 푸나보다 더 황량하다.
“하지만 아저씨가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모이겠죠.” “천만에. 그럴 사람들이 아니야. 루카나스 지방에는 사람들이 많단다. 개미처럼 와글와글하지.” 우리는 여느 일요일처럼 유치장 쪽 회랑으로 갔다. 벌써 마을 어른이 물 분배용 탁자를 준비해놓았다. 광장에 있는 것이라곤 노란 탁자뿐이었다.회랑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탁자는 산후안 마을을 약탈한 사람들이 무겁고 쓸모가 없어 그곳에 버린 것 같았다.
[역주. 마을 어른(barayoc): 원주민 공동체의 지도자. 식민시대, 스페인 제국은 교통의 원활한 해안에 식민도 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데스 고산평야 지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직접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바라욕에게 행정권을 주어 원주민 공동체를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지금도 바 라욕은 마을 어른으로서 축제, 결혼 등 원주민 공동체의 크고 작은 행사를 관장하며, 도덕적 권위자로서 역 할을 담당하고 있다.]
통나무 기둥이 회랑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어떤 지붕은 한쪽으로 기울어 곧 무너질 지경이었다. 하얀 돌기둥만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었다.벤치는 흰 칠이 벗겨지고 사방이 부서진 채로 회랑 여기저기에 나뒹굴 고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에르네스토야, 물이 없단다. 산후안 사람들은 다 죽을 거야. 돈브라울리오는 몇 사람에게만 물을 주고, 다른 사람들은 미워하니까.” “하지만 돈브라울리오는 돈세르히오, 도냐엘리사, 돈페드로에게서 물을 빼앗아 주민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했 다던 데요.” “그건 거짓말이다. 이제 물은 일년 열두 달 내내 돈브라울리오 소유가 된 거지. 그리고 물을 나눠주는 사람 들은 겁이 많아서 돈브라울리오 앞에서 벌벌 떤단다. 돈브라울리오는 여우같고, 개 같은 사람이야.”
우리는 유치장 문 앞에 이르러 회랑 한쪽에 앉았다.
오래 전에 폐광이 된 벤타니야 은(銀) 광산이 보였다. 은광산의 야연광에서 풀죽은 아침 햇살이반짝거렸다. 흰 돌무더기가 산 중턱에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 시커먼 광산이 입을 벌리고 있었 다. 예전에는 큰 광산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에 빠진 촐로들의 밀회 장소였다. 아주 무더운 날에는 소가 들어 가 잠을 자기도 했다. 밤에는 돼지같이 지저분한 사람들이 꿀꿀거렸다.
[역주. 페루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식민시대에는 메스티소(mestizo)와 유사한 뜻으로 해 안 식민도시로 이주, 스페인 문화, 교육, 규범을 수용함으로서 신분 상승을 꾀한 원주민을 일컫는다.]
판타차 아저씨는 잠시 광산의 흰 돌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전에 광산을 할 때는, 산후안 사람들은 부자였다. 지금은 농사 지을 땅도 부족하지만...” “땅은 많아요. 물이 부족해서 그렇지. 사람들이모이게 나팔을 부세요.”
판타차 아저씨는 「낙인가」(烙印歌)를 불기 시작했다. 나팔 소리는 적막한 아침을 가르며 힘차게 퍼져 나갔고,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판타차 아저씨가 나팔을 불면 불수록 산후안은 점점 마을다운 마을이 되어 가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광장 네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붕을 비추고 있는 햇빛도 신이 난 것 같았다. 말오줌나무와 유카리나무의 무성한 잎도 생기가 돌았다. 마 주 보이는 교회의 하얀 정면과 종탑도 눈이 부셨다.
하늘은 아득하게 푸르렀고, 하얀 구름은 산등성이에 눌러앉아 쉬고 있었다. 산자락까지 펼쳐진 케루스와 칸 투스의 잿빛 바다, 침묵에 잠긴 사위, 그리고 판타차 아저씨의 슬픈 얼굴에서 나는 깊은 산 속에서 흔히 느 낄 수 있는 그런 야릇한아픔을 맛보았다.
“아저씨, 한 곡 더 불어 봐요. 산후안을 생각해서.” “한심한 마을이지.”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판타차 아저씨의 나팔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학생들 이 맨 먼저 나타났다. 빅투차, 호세, 베르나코, 프로일란, 라몬차..... 몇몇은 광장 모퉁이로, 몇몇은 투우장 문 을 통해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회랑에 앉아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에르네스토야!” 학생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판타차 아저씨의 나팔 소리를 듣자 학생들은 신이 났고, 모두들 ‘낙인의 춤’을 추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자 축제가 생각났다. 우텍 초원과 야나스 초원에서 옥수수를 수확할 때나틸레, 파파차크 라, 콜파 초원에서 감자를 캘 때 사람들은 축제를 열었다. 고산 평야에서 소에게 낙인을 찍던 광경도 떠올랐 다. 학생들 모습을 보고 있으니, 꼭 우리 안에서 우글거리는 가축을 보고 있는 듯했다. 누렁이, 얼룩배기, 부 락대기, 황소, 투우, 귀와 등에는 띠를 두르고 이마에는 붉은 장식을 단 송아지. 또 아우성치는 소리는 가축 들이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낙인을 찍는 사람들의 걸걸한 목청 같기도 했다. “낙인가, 낙인가.” 나는 신명이 넘쳐 광장으로 뛰어갔다. “춤 춰! 춤 춰!” “야호! 야호!” 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맑게 개인 하늘에서 찬연한 태양이 빛나듯이 우리는 순수하고 신명나는 기쁨에 넘쳐 있었다. 학생들의 낡은 바지는 허수아비처럼 펄럭거리고, 라몬차와 프로일란은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판타차 아저씨는 우리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났다. 나팔 소리는 한결 간드러지게 흥을 돋구었고, 발밑에서는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춤만으로는 우리들의 신명을 다 풀어낼 수가 없었다. 학생 몇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칸라라, 칸라라, 거대한 산이여, 무정한 산이여!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으니 네가 두렵단다 칸라라여, 칸라라여.
“아저씨, 그 노래말고 ‘우텍 초원가’요.” 내가 이 노래를 청한 까닭은 우텍 초원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자란 옥수수 대와 케르칼레스는 정 말 달콤했다.
우텍 초원아 사랑스런 우텍 초원아 메추리 눈은 사랑스럽고 눈속임하는 종달새는 노래하면서 훔친단다 나는 비둘기에게 반했지 우텍 초원아, 사랑스런 우텍 초원아
판타차아저씨의 나팔 소리와 우리들 노래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쌌 다. 몇몇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합창했다. 이내 마을 광장은 흥겨운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의 더럽고 마른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흥이 겨운지 노란 눈이 반짝였다. “이거 한잔하고 싶은데.” “그래. 피스코[역주. 포도 원액을 증류하여 만든 일종의 브랜디] 생각이 간절해.” 판타차 아저씨는 곡조를 바꾸었다. 갑자기 ‘우텍 초원가’를 끊고 ‘추수가’를 불기 시작했다. “추수가다. 추수가!”
아버지, 어머니. 하늘에는 악어새가 반짝거리고 초원에서는 황소들이 싸우고 있어요. 비둘기는 흥겨운 마음으로 ‘티니아이’, ‘티니아이’ 노래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주민여러분, 춤을 추면 하느님이 노합니다. 가뭄이 든 이때, 춤은 절대 금물입니다. 산후안 수호 성자에게 기우제를 지내야 합니다.” 빌카스 어른이 회랑 끝에서 사람들을 꾸짖었다. 광장에 도착한 어른은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는 광경을 목 격하고 분노했던 것이다. 어른은 늙은 원주민으로, 마을 유지들과 사이가 좋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커다란 동굴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동굴의 소유주는 산후안의 부자, 돈브라울리오였다. 돈브라울리오는 어른에게 동굴도 빌려 주고 감자와 옥수수를 심으라고 밭뙈기도 주었다.
[역주. 마을 유지: 일반적으로 도시에 사는 메스티소(mestizo)를 가리켜 페루 원주민들이 부르는 말. 경제적 으로나 사회적 신분으로나 원주민보다 우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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